저는 복 받은 사람입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고, 대단히 재미를 느끼며 일하고 있습니다. 열여덟 해째 하는 드라마 연출이 할 때마다 재미있고, 긴장되고, 기다려집니다. 시청률이라는 아주 객관적이고 냉정한 평가가 있고, 작품이 좋았다고 손뼉쳐 주는 분들의 따뜻함이 있습니다. 이런 냉정함과 따뜻함으로 인해 제 직업은, 최소한 제가 근무하는 곳은, 쓸데없는 잔머리나 정치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드라마에 전념하고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는 한, 저의 사적 영역과 자존심을 함부로 건드릴 사람이 없습니다. 세상 많은 직업인 중에서 보직과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프로젝트(작품)에 집중하려는 사람만이 모인 곳은 많지 않습니다. 실력으로만 판단하는 공정함을 누리는 사람은 더욱 많지 않습니다.
이런 직업에 회의를 느낄 때가 가끔 있습니다. 시간에 쫓기는 방송의 특성으로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만들 때입니다. '하루만 더 있었으면, 한 시간 만 더 있었으면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말이 되는 이야기로 바꿀 수 있을 텐데'하고 한탄을 하지만, 언제나 그 하루, 한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 부족한 한 시간 때문에 피 같은 제 작품을 제대로 깊지도 못하고 누더기인 채로 내던지듯 시장에 내다 팝니다.그런 부끄러움을 매 작품 경험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TV 드라마는 '혼이 없다', '너희는 양아치다'라고 비웃을 때 감히 항변하지 못합니다.
주위에서 추문이 터질 때입니다. 며칠 전부터 다시 죽은 장자연 양의 편지가 보도되고, 그녀를 착취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가십거리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연기자로서 성공하길 바랐던 한 여배우의 미래가 추한 욕망 속에서 훼손되었습니다. 저는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햇볕이 드는 양지(陽地)에 있는 사람이라 음지(陰地)의 일을 잘 알지 못합니다. 실제로 어느 연예인이 그런 욕망의 사다리를 딛고 정상에 올랐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작품 하나 하나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다해보자.'라는 각오로 덤벼드는 많은 제작진에게, 그런 성공의 급행 코스는 너무나 모욕적인 소식입니다. '한 땀 한 땀'이라는 말이 어느 드라마에서 나왔듯, 우리의 작품과 연기는 한 컷 한 컷 최적의 대본과 연출, 연기자가 결합하여서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한 컷 한 컷' 만들어도 시청자나 관객이 외면하는 냉정함이 이곳에 있습니다. 구도자적인 자세로 작품에 임하는 사람에게 이런 스캔들은 '혹시 우리의 세상을 사는 방법이 틀린 것 아닌가' 하는 현기증이 들게 만듭니다.
인간관계를 생각할 때입니다. 흔히 말하는 '갑과 을'의 위치에서 저희는 '을'인 경우도 있지만 '갑'인 경우가 많습니다. 갑에게 친해지려는 '을'은 진심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갑과 을'의 관계가 깨지면 그에 따른 인간관계도 함께 분해됩니다. 인생의 가장 오랜 세월을 직업을 통해 보내고 여러 '갑과 을'이 관계를 맺습니다. 그 오랜 세월 쌓은 인간관계가 이해에 바탕을 둔 모래알 같은 것이라고 느낄 때면 굉장한 회의감이 들곤 합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제게 영원히 남을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합니다. 제게는 '작품'이 남을 것입니다. '양아치'소리를 듣지 않게 '한 땀 한 땀'은 아니더라고, 저의 능력과 체력이 허락하는 최대의 결과물을 만들려고 합니다. 비즈니스를 인간관계처럼 위장한 허망한 만남으로 제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서 제가 '정말 즐거운 곳', '좋아하는 곳'이 아니면 괜히 끼어들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마지막으로 저런 추문이 나에게도 해당하지 않도록 몸과 마음을 가다듬으려 합니다. 그러나 제가 얼마나 욕망과 유혹에 약한 사람인지 잘 알기에, 저에게는 드라마 PD로서의 삶이 힘겹고 무서운 업보이기도 합니다.
태그 : 드라마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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