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이유 [블랙]

어릴 적에 저는 부모님께 원망을  많이 했습니다. 남들보다 체구도 적었고 운동 신경이 부족했습니다. 수학 실력이 뒤처졌고 미술에도 소질이 없어 보였습니다. 부모님께 '날 왜 이렇게 평범하게 낳았느냐'고 철없는 원망을 소리높여 하기도 했었고, 급기야 진학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왜 나를 세상에 내보내서 이 고생을 시키느냐'고 원망을 했습니다.

뿌린 데로 거둔다더니 제가 아이에게 그 소리를 듣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아들이 영어, 국어 등이 힘에 부치는지 과제를 할 때마다 엄마랑 크게 한 판씩 싸움이 나곤 합니다. 급기야는 아홉 살짜리 입에서 상상 못할 소리가 터져 나옵니다. 

"왜 나를 낳았냐구, 왜 나를 이렇게 낳았느냐구"

그러자 엄마도 열을 받았는지 받아칩니다.

" 이 자식 말하는 거 봐. 너 나가. 나가서 들어오지 마."

대답이 가관입니다.

"싫어. 나도 먹고살아야 할 것 아냐."

그 소리를 듣다 한참 웃었고 예전 제가 부모님께 했던 비슷한 원망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어머니께서는 제게 어떤 신문 스크랩을 보여 주셨는데 지금 그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름대로 위안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왜 낳았냐고 묻는 아이에게 뭐라고 대답해 주어야 할까요?

저는 '세상에는 아주 좋고 행복한 일이 많기에 그걸 경험해 보려고 태어난 것이다' 라고 일단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너 안에 너도 모르는 수많은 가능성이 있다. 그 가능성을 알아보려고 태어났다'라고도 대답했습니다. 어린 아이에게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아이의 태어남으로 부모에게 인생 최고의 행복을 맛보게 해주었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솔직한 대답이었을 것입니다. 

어제 촬영 중간에 시간이 비어 영화 [블랙]을 보았습니다. 헬런 켈러처럼 눈이 안 보이고 귀가 안 들리게 된 아이가 한 선생님과 수화를 매개로 자립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새삼 제가 가진 것에 감사할 수 있었고 보통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평범함의 특권을 다시 느낀 기회였습니다. 세상에 나와 평범한 육체를 가진 순간부터 축복이 시작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이가 그 축복을 마음껏 활용해 수많은 성취의 기쁨을 누렸으면 합니다. 이것이 오늘 제가 느끼는 세상에 사는 이유입니다.

by 용PD | 2009/09/20 07:15 | 좌고우면 | 트랙백 | 덧글(3)

좋은 시나리오 나쁜 시나리오

좋은 시나리오, 나쁜 시나리오 - 8점
토머스 포프 지음, 박지훈.윤용아 옮김/커뮤니케이션북스

언젠가 한 드라마 프로듀서가 시상식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좋은 대본 아래 나쁜 연출 없고, 나쁜 대본 아래 좋은 연출 없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이런 표현이 나올 수 있을 정도로 영화나 드라마에서 대본의 완성도는 작품의 성패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칩니다. 그래서 연출가가 작품을 준비할 때 가장 신경을 쓰는 부분이 대본의 완성도입니다. 이 때문에 연출의 제1의 임무는 작가에게 도움을 주거나 대본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문제는 프로듀서로서 작가를 도와줄 수 있는 일의 범위가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유능한 PD가 작가와 대본을 위해 할 수있는 최선은 주로 실수와 실패를 막아주는 것입니다. 결국, 드라마나 영화를 재미있게 하는 열쇠는 작가 스스로 찾아야 합니다. '이 대본에 무엇이 문제이다 이것을 고쳐라.' 까지는 여느 PD도 할 수 있지만 '어떻게'에 대해서 안내할 수 있는 PD는 많지 않습니다. 이렇게 PD와 작가가 만나서 대본을 수정하는 과정과 비슷한 모습을 토머스 포프가 지은 [좋은 시나리오 나쁜 시나리오]를 읽으시면 목격하실 수 있습니다. 한 대본이 어떻게 좋은 작품으로 영상화되었는지, 어떤 점을 수정했다면 더 좋은 작품이 되었을지, 연출가 작가가 커뮤니케이션하는 모습을 참관하는 과정이 있다면 그것은 백만 금을 주고 참석할 만한 가치 있는 세미나일 것입니다. 실수를 막아주는 프로듀서와 명작을 창안해 낸 작가의 공동 수업을 듣는 것과 비견한 일입니다.

이 책의 작가 토머스 포프는 프로듀서 출신은 아닙니다. 작가의 시선으로 이미 영화화된 시나리오를 복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프로듀서들의 목소리와 비슷합니다. 좋은 시나리오의 장점과 나쁜 시나리오의 단점을 골라내는데 그 안목이 높습니다. 안목이 높다는 것은 초보자에게 쉬운 가르침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적의 수준이 높기에 초보자들이 느낌이 올 정도로 명확하고 짜릿짜릿한 가르침은 아닙니다. 그러나 경험자들에 포프의 지적은 가려운 데를 긁는 시원함이 있습니다.

덧붙여 명작과 졸작이 탄생하게 된  속사정을 들여다보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뮤지컬의 고전인 1951년작 [Singin' in the Rain]이 제작자가 이미 가지고 있는  1920 ~30년대의 노래를 재활용하고자 기획되었다는 특별한 속사정은 놀라웠습니다. 스토리가 만들어지고 곡이 나온 것이 아니라, 주어진 곡에 스토리를 꿰맞춘이 말 되지 않는 기획을 베티 콤덴과 아돌프 그린 두 작가가 어떻게 명작으로 바꾸었는지 흥미진진한 뒷얘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초보자에게는 과한 책, 경험자에게도 쉬운 책은 아닙니다. 우선 이 책의 리스트에 오른 영화를 보고 한 편 한 편 작가의 분석을 따라 고민한다면 좋은 공부가 되리라는 점은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by 용PD | 2009/09/15 10:27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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